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설민석/논란 및 사건 사고 (문단 편집) ==== 일본 [[전쟁 범죄]] 편 관련 ==== * 731부대와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전범재판에 관련하여 [[더글라스 맥아더]]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맥아더의 정책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 이후 미국정부에게서 통치권한을 부여 받았어도 당연히 [[미국 정부]]의 허가와 승인 없이 불가능하며, 전범재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보다 맥아더의 인지도가 더 높아서 '맥아더가 했다는 걸로 언급'해야 집중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편집을 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도 이미 몇개월 전부터 항복하는 조건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으며, 군부가 [[포츠담 선언]]을 '덴노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이라면서 거부한 결과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였다. 외교관들은 무조건 항복이 덴노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여 [[포츠담 선언]]을 즉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 측은 [[인간선언]]의 후폭풍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공개 범위를 최대한 축소하려고 물밑에서 접촉을 자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예 중 하나가 실무자인 맥아더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극진히 대접한 것이다. 제국대학(현 [[도쿄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로 외교관을 거쳐 외교관의 수장인 외무대신까지 지낼 정도로 영어를 잘했던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가 알아서 [[평화헌법]]과 인간선언의 초안을 영어로 써서 맥아더에게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극우들이 가장 많이 떠들어대는 "현행 헌법은 외세의 강요로 만들어졌으므로 무효다!" 식의 논리도 이걸로 반박 가능하다. 미국이 강요한 게 아니라 총리가 먼저 써주고 합의해줬기 때문. 미국도 일본인들의 정신문화를 연구하여 [[국화와 칼]]이라는 서적을 편찬했으며, "일본인들한테 [[일본 황실]]을 없앤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싸우려 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맥아더 역시 덴노의 입지를 알고 있었기에 인간선언을 하면서 일부러 자신과 히로히토가 같이 서 있는 사진을 찍었으면서도 [[일본 황실]] 자체를 없애지는 않았다. * 맥아더가 쇼와를 접견하기 며칠 전에 [[미국 정부]]에서 맥아더에게 '히로히토에 대한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낸 걸로 보면 미국과 맥아더가 같이 움직인 것으로 언급해야 하지만, 강의 내용에서는 이런 공문에 대한 언급이 없고 마치 맥아더가 독단적으로 사건을 처리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도 없어진 이상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 본토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발생하자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자문 및 군사 장비만 지원해주었을 뿐 전쟁 내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중엔 [[중국 공산당]]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국민당 정부가 부패했다는 이유로 손절하게 된다. 제1,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지만 그 시기의 미국은 전쟁을 피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즈음 관계가 냉각되는 [[소련]]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경우 그의 외교적 정책들이 반공주의가 색채가 강했고 그의 결과물은 트루먼 독트린으로 나오게 된다. 여기에 [[일본 정부]]의 물밑작업이 잘 먹혀들어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설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